전기차는 내연기관차에 비해 구동 부품이 적어 기계적 결함이 적을 것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최근 실제 도로 위에서는 예고 없는 시스템 오류로 인한 주행 불능 사례가 보고되면서 전기차의 신뢰성 문제가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러한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전기차의 주행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 전극 기술을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현존하는 전기차의 불안요소와 이를 극복할 미래 기술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주행 중 배터리 0% 급락… 쉐보레 이쿼녹스 EV의 ‘벽돌 현상’
최근 미국의 전기차 전문 유튜브 채널 ‘스테이트 오브 차지(State of Charge)’의 운영자 톰 몰러니가 겪은 쉐보레 이쿼녹스 EV의 고장 사례는 현재 전기차 시스템이 안고 있는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출고 후 주행 거리가 약 9,500마일(약 15,288km)에 불과했던 그의 차량은 특별한 전조증상 없이 도로 위에서 멈춰 섰다.
사건은 차량을 6일간 주차한 뒤 시동을 걸었을 때 발생했다. 계기판상 배터리 잔량은 46%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주행을 시작하자마자 수치가 0%로 곤두박질치며 모든 동력을 상실했다. 다행히 스티어링 휠 잠김 현상은 발생하지 않아 갓길로 대피할 수 있었으나, 차량은 소위 ‘벽돌(Bricking)’ 상태가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점은 견인차가 도착한 후 다시 시동을 걸자 배터리 잔량이 거짓말처럼 46%로 복구되어 자력으로 견인차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고전압 배터리 자체의 결함보다는 12V 보조 배터리의 전압 문제나 소프트웨어 오류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톰 몰러니는 고장 일주일 전 ‘마이쉐보레’ 앱을 통해 고전압 배터리 경고 알림을 받았으며, 주차 중 배터리 잔량이 58%에서 46%로 12%나 자연 소모되는 비정상적인 패턴을 보였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 문서와 동호회 사례를 종합해 볼 때, 블레이저 EV나 캐딜락 리릭 등 GM 계열 전기차에서 유사한 소프트웨어 오류나 배터리 케이블 핀 부식 문제가 보고되고 있어 이는 단순 개별 차량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UNIST, 주행거리와 출력 동시에 잡는 원천 기술 개발
상용 전기차들이 현장에서 크고 작은 신뢰성 문제와 씨름하는 사이, 실험실에서는 전기차의 고질적인 성능 한계를 극복할 낭보가 전해졌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화학공학과 정경민 교수팀이 전기차 배터리의 출력을 기존 대비 약 75% 높일 수 있는 대용량 전극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그동안 전기차 시장에서는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전극을 두껍게 쌓는 ‘후막 전극’ 기술이 주로 사용됐다. 하지만 전극이 두꺼워질수록 리튬이온의 이동 경로가 길어지고 내부 구조가 복잡해져, 오르막길 가속처럼 순간적인 고출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힘이 달리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즉, 주행거리를 택하면 출력을 희생해야 하는 딜레마가 존재했다.
전극 내부 기공 제어로 고출력 구현
정 교수팀은 전극 내부의 미세 구조에 주목해 해법을 찾았다. 전극 내부에는 리튬이온 이동이 원활한 큰 기공(입자 간 기공)과, 도전재와 바인더가 뭉쳐 이온 이동을 방해하는 미세 기공(CBD 구조)이 공존한다. 연구팀은 자체 개발한 ‘이중공극 전송선 모델(DTLM)’을 활용해 이 미세 기공의 구조를 최적화하고 도전재 함량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새로운 설계 방식을 고안해냈다.
그 결과, 면적당 용량이 10㎃h/㎠에 달하는 고용량 전극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출력 성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30분 이내 완전 충·방전이 이뤄지는 가혹한 조건에서 기존 전극은 면적당 용량이 0.98mAh/㎠에 그친 반면, 신기술이 적용된 전극은 1.71㎃h/㎠를 기록했다. 이는 짧은 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전기 에너지가 약 75%나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정경민 교수는 “이번 성과는 설계 난도가 높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전기차 시장이 겪고 있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의 과도기적 진통 속에서도, 핵심 부품인 배터리 기술은 주행거리와 출력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